About 경영학박사
B. Braun Korea President
김해동님의 블로그
hd.kim@hotmail.com

Pink Floyd

김해동 | 2012.10.09 15:09 | 조회 1617
2003.05.13
 
60년대 중반 Beatles라는 걸출한 그룹이 Rock을 선보이고, Heavy Rock, Progressive Rock 등으로 변형, 발전(?)되어 가는 70년대 중반 까지를, 덩달아 심화된 Folk Song, Rhythm & Blues 등과 함께 Popular Music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하는데 의의를 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그 시절을 감성 예민한 10대 후반, 20대 전반으로 살았다는 것은 큰 축복이 였습니다.
 
그 당시 한국 TV에서는 Classical, Popular를 막론하고 소위 서양 음악은 한참 뒷전이 였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놀랍게도 칸소네가 주류를 이루었던 European Song Festival(?)을 매년 녹화 중계해 주어 젊은 저희를 열광 시켰던 것을 제외 하면, 남진, 나 훈아, 이 미자 씨로 대표되는 트롯트 가수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그 장르는 음악을 즐기건 아니건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젊은이들이 방송 매체에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있었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Rock이 조금씩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펄 씨스터스가 나오고, 신 중현 사단의 첫 주자(?)인 김 추자도 나오고, Folk 쪽으로 "통기타 세대"라는 그 당시 신종 어를 만든 송 창식의 트윈 폴리오와 양 희은이 노래를 시작 하면서, 국산 가요도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FM 라디오가 음악을 줄곧 틀고 있었습니다 만, "별이 빛나는 밤" 등으로 대변되는 감상적인 여고생 대상의 소위 Easy Listening 일변도로, 저희 고픔을 달래 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AFKN이었으니, 남의 나라 군인 방송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나의 빛나는(?) 젊음이 였습니다.
 
빽판으로 불리 운 불법 복제판이 저희 가난한 학생들에겐 구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달 잡비가 2~3,0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원판이라고 불린 정품, 그것도 중고가 5,000~10,000원이 였으니, 몇 백원에 살수 있는 해적 빽판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 가요가 이끄는 지금 중국, 일본등지에서 일어나는 한류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대학을 진학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유신 정권 때문이 였는지, 암울한 나라 살림살이 때문이 였는지 저의 취향은 자꾸 염세적으로 변하여 갔습니다. 그 시대의 음악 풍과 점점 가까워 지는 것이 였지요. 월남전으로 만신창이된 미국이 주도하는 Folk Song에서 반전이 가장 Popular한 Issue가 되고, Rock은 점점 허무해져 가 Doors, Jim Morrison의 The End에 가서는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어 보였습니다.  
 
Pink Floyd의 "Dark Side of the Moon" Album이 나온 것이 73년도 였습니다. 제가 1년 재수 끝에 대학을 입학한 해 이지요. Album title도 허무 그 자체입니다. 영원히 햇빛이 미칠 수 없는 어두운 곳! 이 곡이 허무에 빠진 한 청년에게만 전율의 감흥을 준 것이 아니 였던 모양입니다. 당시 Bill Board Chart에 1천2백60주 이상을 머무르며, 모든 앨범 판매를 통틀어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고,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꾸준히 팔리고 있으니 당분간 아니 영원히 이 기록은 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Pink Floyd의 리더인 Rodger Waters 의 천재적 음악성은 한참 후 통독을 기념하는 부란덴 부르크 공연 "The Wall" 에서도 재확인 됩니다만 Pink Floyd는 Progressive Rock이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만들며, 그때 부터 소리에 가장 충실한 음악 그룹 이였습니다. 70년대 초반에 순회 공연을 위한 음향장치를 움직이기 위하여 40feet Container 트럭 여러 대가 따라다녀야 했고, 비행기음 효과를 내기 위하여 그 시간에 실제 비행기를 공연장 상공에 띄울 정도였으니 소리에 대단히 민감한 제 귀를 만족 시키기에 최적의 Musician이였고 따라서 제가 Pink Floyd에 빠진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전 음악을 아마 가슴으로 들었나 봅니다.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부르르 떨렸으니까요. 그것을 전율이라고 표현하나요? 이때 제가 어리석은 소리를 했답니다. "여자 없인 살아도, 음악 없인 살수 없다"고.
 
중학생 시절부터 형님께서 3년간의 초급 장교 월급을 꼬박 모아 장만한 Audio System으로 인하여 이미 단련되고, 친구 Cafe에서 무보수로 판을 틀어주며 세련된 귀를 만족 시킬 수 있는 System을 구축 하기에는 가난한 학생이 한 두 푼 모아, 또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마련할 수 있는 돈의 한계를 훨씬 넘기는 것 이었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엄청난 괴리는 젊은이 가슴에 깊은 상처만 입히고, 훗날 돈이라는 것을 벌게 되면 제일 먼저 나를 감동시킬 수 있는 Audio System을 구축하겠다는 결의만 남긴 채 소리에 대한 집념을 꺾고 군대를 갑니다. 그 결의를 실행하기 위하여 그로부터 20여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채...
 
음악 없이 하루도 못산다 던 젊은이는 그로부터 20년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삭막한 삶으로 채운 후, 나이 40을 넘겨서야 음악을 다시 찾습니다 만, 월등히 좋아진 소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가슴 떨리는 감격은 느끼지 못합니다. 음악을 소화하는 가슴이 다 망가졌던 모양입니다.
 
2002년 10월 호 Esquire잡지를 뒤적이다 ‘남자가 30이 되면 하지 말아 될 것들’이란 기사가 있어 무심코 보았는데 ‘엄마, 아빠 호칭 사용하기, 반바지 밖으로 속옷이 나오는 것’ 등 내, 외면 공히 무게 있게 자기 자신을 책임지라는 이야기인 듯 한데 놀랍게도 그곳에 "핑크 프로이드 듣기"가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30은커녕 50을 넘긴 저의 자동차 CD Magazine에 과거 10여년간 그것도 한두 장이 아닌 3장씩이나 터주대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핑크 프로이드의 앨범들인지라 그저 제가 젊게 살고 있는 모양이야 하고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생각할수록 괘씸한 느낌이 드는 것 이였습니다. 핑크 프로이드를 듣는 것이 바지 밖으로 속옷을 흘리는 반푼 같은 짓에 비교되다니 요? 글 쓴 이가 Pink Floyd의 명곡들을 들어 본적이 없거나 아니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사람이 Progressive Rock의 뜻을 잘못 이해 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2002년 깊은 가을 Rodger Waters가 마지막(?) World Tour중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 하였습니다. MD Player earphone을 귀에 붙이고 사는 고2 아들놈 손을 잡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Pink Floyd를 처음 접하고 3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Rodger는 그 연세에 아직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몸매에, 카리스마 넘치는 그때 그 목소리 그대로, 전혀 편곡을 더하지 않은 그때 그Original곡 그대로, 청중을 압도하는 그때 그 Sound 그대로 내가 Pink Floyd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의 아들 손을 잡은, 배 나온 몸과 망가진 가슴의 50을 넘긴 초로의 남자를 끝도 없이 전율 시켰습니다.
 
  2002년 늦은 가을
facebook
8개(1/1페이지)
HD' Life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8 물맛 김해동 3352 2012.10.09 15:03
7 와인과 골프 김해동 3758 2012.10.09 15:04
6 Global Etiquette 김해동 3688 2012.10.09 15:05
5 칼바도스 김해동 1521 2012.10.09 15:06
4 천한술(?) 김해동 1475 2012.10.09 15:07
3 Audio 김해동 2037 2012.10.09 15:08
>> Pink Floyd 김해동 1618 2012.10.09 15:09
1 Ski 김해동 1973 2012.10.09 15:10